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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딛고 최고가 되다, 프로농구 MVP 박상오 동문

관리자 2011-04-27 조회 1568

박상오 동문이 소속팀의 정규리그 우승이 확정된 후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사진제공- KT 스포츠단)

 

2010-2011 프로농구 시작 전, 전문가들은 꼴찌 후보로 부산 KT 소닉붐을 꼽았다. 팀의 주축 선수인 조성민, 송영진 등이 부상을 당했고 팀의 리더였던 신기성 마저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로 이적했기 때문. 하지만 전문가들이 간과했던 선수가 한 명 있었다. 바로 박상오(사회체육학부 00학번) 동문. 그는 시즌 내내 코트를 종횡무진하며 팀을 이끌었다. 매 경기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를 선보였고, 팀은 단일팀 한 시즌 최다승인 41승을 거두며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평균 31분 24초를 뛰며 14.9득점 5.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던 박상오 동문은 정규리그 MVP 투표에서 유효표 78표 중 무려 43표를 획득해 당당히 MVP 트로피를 손에 쥐었다. 

 

팀은 아쉽게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올시즌 박상오 선수가 보여준 활약은 새로운 스타의 등장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싱그러운 봄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봄날, 서울의 한 카페에서 박상오 동문을 만났다. 수트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온 그는 코트에서 몸을 날리는 허슬 플레이어가 아니라 친근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을 주었다.

 

 

힘 뿐만 아니라 세밀함으로 경기를

장악하는 ‘슬램덩크’의 신현철을 보면

박상오 동문이 떠오른다.

(이미지발췌- 슬램덩크)

 

# '슬램덩크'에 빠진 소년, 농구공을 잡다


초등학교 시절, 박상오 선수는 두 가지에 매료되었다. 하나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슬램덩크'와 장동건, 심은하, 손지창, 이종원, 신은경 등 당대 청춘 스타들이 총출동한 드라마 '마지막 승부'. 그가 매료된 두 가지는 '농구'라는 한 단어로 함축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농구의 매력에 빠졌던 것이다.  

 

필자가 "그러고 보니 박상오 선수의 플레이는 슬램덩크의 신현철을 보는 것 같네요." 라고 말하자, 그는 "에이, 얼굴이 더 닮았다고들 해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183cm로 이미 농구선수로서의 자질을 보여왔던 그다. 광신중학교에 진학하자, 당시 농구부 코치가 그의 키와 덩치를 보고 발탁했다.

 

'슬램덩크'와 '마지막 승부'를 꿈꾸던 소년이 농구공과 처음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 중앙대, 그에게 시련을 주다


광신중학교, 광신정보산업고를 거치는 동안, 그는 점차 농구선수로서 모습을 갖춰갔다. 그리고 허재, 강동희, 김유택 등을 배출해낸 전통의 명문인 우리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농구선수로서의 영광이 아니라 '죽고 싶을 만큼의 시련'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 농구부는 대학 최강팀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김주성(98학번), 박지현(98학번), 송영진(97학번), 황진원(97학번) 동문이 있었다. 화려한 선배들 틈에서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자연스레 출장시간도 줄어들었다. 아니, 경기에 나오지 않는 날이 나오는 날보다 많아졌다. 광신정보산업고의 에이스에서 후보선수로 전락한 그는 훈련장을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제일 많이 방황했던 시기였죠. 과연 내가 농구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2학년때 과감하게 그만두었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함께 해온 농구공과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농구를 그만두고 계속해서 방황했습니다. 공부도 안되고, 늘 내리에서 당구만 치고 미팅만 하러 다녔죠. 그러다가 문득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어서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홀연히 학교를 떠났다.

 

# '농구 선수 박상오'가 아닌 '보급병 박상오'

 

박상오 선수는 농구를 하는 다른 선수들처럼 상무(국군체육부대)나 공익근무요원이 아닌,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자연스레 농구와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는 인천에 위치한 '육군 3군수사령부'에서 2년간 현역병으로 복무했다. 그의 보직은 전투식량 보급병.

 

"창고에 주로 있었어요.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아서인지, 말년 때까지 작업에 불려나갔어요."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군대에 소위 '말뚝'을 박을까도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장교 시험도 준비하려고 했고요. 하지만 어느 날 어머니께서 면회를 오셨어요. 다시 농구를 해보자고 하셨죠."

 

# 다시 농구공을 잡다

 

"전역을 앞두고 광신정보산업고 시절 은사님인 장덕영 선생님이 찾아오셨어요. 네 재능이 너무 아까우니 다시 농구를 시작하자고 하셨죠."

 

그는 다시 도전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훈련장을 뛰쳐나가기 일쑤였고, 결국에는 제발로 걸어나간 농구부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테스트를 받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우리 학교 체육학부와 선수 학부모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고 한다. 스무살 때 저질렀던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고 만 것이다. 그는 장덕영 감독과 당시 우리 학교 농구부 코치였던 김영래 코치의 도움으로 간신히 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테스트는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났다. 강정수 감독은 그에게 "한 달만 해보자. 대신 내가 나가라 하면 두말없이 나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나가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의 진가를 서서히 인정받게 된 것이다.

 

"정말 매니저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농구공을 잡았어요. 다시 농구부에 들어와도 여전히 제 자리는 없었죠. 심지어 엔트리에도 등록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3년만에 재회한 농구와 그는 다시 사랑에 빠졌다. 농구에 대한 흥미를 다시 찾아갔고, 늘어가는 흥미만큼 실력 역시 일취월장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박상오 동문(왼쪽)이 재학시절 대학농구 2차 연맹전 경희대와의 경기에서 골밑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사진출처- 점프볼)

 

# 에이스의 귀환 

 

2005년 6월, 원주에서 개최된 '원주시장배 대학농구 1차 연맹전'. 우리 학교 농구부는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주전 센터로서 골밑을 책임지던 함지훈 동문(03학번)이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고 만 것. 주전 선수들이 부상으로 빠진 농구부는 맞수 고려대에 99-71, 28점차로 대패하고 말았다.  

 

위기감 속에 맞이한 연세대와의 경기. 1쿼터가 시작하고 3분여가 지났을 무렵, 장일 당시 농구부 감독은 벤치에 앉아있던 그를 불렀다. 

 

"상오! 몸풀어!" 

 

박상오 선수는 드디어 점퍼를 벗고, 스트레칭을 하며 코트에 컴백할 준비를 했다. 그 동안의 한 때문일까. 그는 이 날 24득점을 쏟아 부었다. 팀 역시 연장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84-79로 승리했다.  

 

주전 선수들이 빠졌지만 박상오 선수가 이끌었던 우리 학교는 결국 고려대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3년여만에 코트에 복귀한 박상오 동문은 우수상을 수상하며 자신의 이름 석자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그야말로 '에이스의 귀환'이었다.

 

 

올 시즌 프로농구는 ‘박상오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상오 선수가 경기 중 호쾌한 덩크슛을 성공시키고 있다. (사진출처- OSEN)

 

# 프로에 진출하다


2007년 2월, 서울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가 한창이다. 양희종, 김태술(이상 연세대), 정영삼(건국대)에 귀화선수인 이동준까지. 이 해 드래프트는 일명 '황금 세대 드래프트'라 불렸다. 농구팬들 역시 내가 응원하는 팀에는 어떤 루키가 올까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5순위 지명권을 받은 부산 KTF 매직윙스(현 부산 KT 소닉붐)의 추일승 감독. KTF의 팬들은 귀를 의심했다. 추일승 감독이 부른 이름은 다름아닌 박상오. 아직 지명되지 않은 유명 선수들이 많았기에 팬들은 그의 지명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상오 선수는 드래프트장에서 아랫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반드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리라는 다짐이었다. 

 

사실, 박상오 선수는 2006년 '존스컵 국제 농구대회'에 대학선발팀으로 출전했었다. 당시 그는 체격이 좋은 중동 선수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으며 매 경기 20득점 이상을 기록하며 프로팀 스카우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프로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용병한테도 밀리지 않는다"라는 평을 받았던 그다. 그의 5순위 지명은 오히려 '낮은 순위'로 지명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프로 3년차에 접어들던 2009년 4월. 그는 또 한번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출장 시간은 계속해서 늘어갔고, ‘주전급 식스맨’으로 프로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밀함이 부족해 그저 '힘 좋은 선수'라는 평가만이 그를 뒤따랐다. 그러던 차에 전창진 감독이 새롭게 부임해 온 것.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워낙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전창진 감독은 그의 잠재력을 알아봤다. 전창진 감독은 그에게 "넌 내가 키운다."고 말했고, 그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훈련에 열중해야만 했다. 그리고 올시즌, 그는 코트의 중심에서 화려하게 비상했다.


2010-2011 프로농구 최우수선수상의 주인공은 박상오 동문이었다.(사진제공- KT 스포츠단)
 

# 운명적인(?) 사랑


이번에는 사랑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박상오 선수가 쑥쓰러운 미소를 띠며 짖궃은(?)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부산 사직 야구장에 사인회를 갔는데, 지금의 아내를 만났죠. 당시 흰 티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정말 눈이 부시더라고요. 마침 자리도 제 근처에 앉았었어요. 야구 경기는 보지 않고 아내만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가 쑥쓰러운 듯, 허허허 웃어보였다. 

 

그는 그 날 이후 지인들을 수소문해 결국 지금의 아내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코트에서만 끈질긴 플레이를 보여주는 줄 알았더니, 사랑에서도 끈질긴 '허슬 플레이어'였다.

인터뷰를 마친 후, 박상오 동문에게 포즈를 요청했다. 그가 쑥쓰러운 듯 포즈를 취해주었다.


# 중앙인들에게 

 

어느덧 마지막 질문에 이르렀다. 마지막 질문은 현재 학교를 다니고 있는 중앙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랬죠.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저는 그 기회를 두 번째까지 쓴 것 같아요. 중학교 시절, 농구와 처음 접한 것이 첫 번째, 그리고 3년간의 공백 후 다시 농구공을 잡았던 것이 두 번째 기회. 이 두 번째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아요. 힘들어서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도 이를 악물고 버텼어요. 후배들에게 처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또 버텼죠. 힘들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좌절하지 않고 계속 버티다 보면, 언젠가 그 보답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주문한 커피를 마시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식어버린 커피를 손에 들고 지하철에 오르며 박상오 동문의 새로운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시즌, 그의 화려한 비상을 다시 한번 기대해본다.

 

☞ 박상오 동문

[프로필]

- 생년월일 : 1981년 3월 24일

- 신체조건 : 196cm 105Kg

- 출신학교 : 봉천초 - 광신중 – 광신정보산업고 – 중앙대학교 사회체육학 학사

- 소속팀 : 부산 KT 소닉붐

- 포지션 : 포워드, 센터

- 가족 : 아내 김지나氏 (2010년 7월 결혼)

 

[주요경력]

- 2007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 (부산 KTF 매직윙스)

- 2011년 프로농구 정규리그 최우수 선수상(MVP)

- 프로 통산 143게임 평균 10.2득점 3.6리바운드 1.1어시스트

- 2010~2011시즌 54게임 평균 14.9득점 5.1리바운드 1.5어시스트

취재 : 홍보대사 현창민(경영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