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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를 “세계의 중앙”으로 이끌다. U-17 여자 축구대표팀 최덕주 감독 ! (체육교육 80)

관리자 2010-10-12 조회 2142

 

한국 축구를 “세계의 중앙”으로 이끌다.

U-17 여자 축구대표팀 최덕주 감독 ! (체육교육 80)

  

‘세계를 재패한 축구 감독.’

  

대한민국에서 이 거창한 수식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딱 한 명뿐이다. 그는 바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피파 주관 세계 대회를 석권한 최덕주 동문이다. (체육교육 80학번). 지구 반대편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태극 소녀들을 세계의 정상에 올려놓으며 한국 축구 역사를 새로 쓴 그는 선수단과 함께 귀국한 뒤 그 어느 때 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우리 학교의 슬로건 ‘한국의 중앙에서 세계의 중앙으로’를 멋지게 실천해 낸 최덕주 동문. 그를 만나 그의 인생과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1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최대 고비였던 나이지리아전 뒷이야기

나이지리아전에서는 분위기가 처져있던 대표팀에게 자극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최덕주 동문은 하프 타임 때 물통을 걷어차는 등의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자신의 스타일을 너무나 잘 아는 선수들에게 그 의도를 들켜버렸지만 효과는 적중했다. 이 같은 최덕주 동문의 '퍼포먼스'는 선수들의 투지를 불태웠고, 결국 연장 접전 끝에 극적인 역전승을 따냈다. 4강전인 스페인전을 앞두고도 최덕주 동문은 고도의 심리 전략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그는 "나이지리아전에서 실수했던 부분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실수에 대한 회상과 두려움으로 선수들이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잘했던 공격적인 부분만 보여줬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숙명의 라이벌 일본과의 결승전 뒷이야기

일본과의 결승전을 회상하며 최덕주 동문은 일본과의 결승전에서는 '징크스'를 잘 살려 우승컵까지 들어 올렸다고 말했다. 우리가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1-0으로 이긴 적이 있어 선수들 사이에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큰 경기 경험이 적은 어린 선수들이 경기에 앞서 부정적인 마인드를 갖기 전에 ‘긍정의 징크스’를 심어준 것이 팀의 전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을 이길 수 있었던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최덕주 동문이 일본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에서 짧은 선수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랜 기간 지도자 생활을 했다. 그때의 경험을 살려 그는 선수들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상대가 약점을 보이면 엄청나게 강해지는 게 일본인”이라며 “초반부터 거칠고 강하게 부딪치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또 “역사 얘기까지 섞어가면서 한일전의 특수성을 강조했다”며 “결국 정신력이 승부차기까지 가는 대장정을 승리로 끝맺은 요인”이라고 했다.

최덕주 동문은 우승의 원동력을 숫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언뜻 보면 포메이션을 연상케 하는 '4-3-3'이라는 숫자가 우승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하는 ‘4-3-3’이란 기술과 정신, 체력 세 부문을 10으로 놓고 분배했을 때 비율이다. 그는 "기술을 4로 가장 중시하고 정신과 체력을 각각 3으로 놓고 팀 전력을 키워나갔다. 때문에 한국 선수들의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2. 최덕주 동문의 리더쉽

 

최덕주 동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아버지 리더십’ ‘할아버지 리더쉽’에 대해 물었다. 거친 남자들 속에서 젊은 시절 선수와 감독 생활을 했는데 어떻게 여심을 읽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다. 이 질문에 최덕주 동문은 아버지 리더십이 아니라 진짜 아버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딸을 셋이나 둔 아버지입니다. 애들을 키우면서 여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남자들과 어떻게 다른지 잘 알잖아요. 어린 여자선수들은 윽박지르거나 거칠게 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지. 감성적으로 세심하게 아이들을 감싸주는 게 남자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그래도 강하게 할 때는 확실히 강하게 해야 합니다. 나이지리아전에서 보셨잖아요, 선수들이 집중을 하지 못하고 우리만의 플레이를 보여 주지 못했을 때 아이스박스를 걷어차는 행동이 선수들에게 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결국에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축구 했을 당시에는 지고 오는 날에는 맞는 날이고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도 나이나 학년이 안 되면 굽혀야 하는 상황이 많았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감독이 고집으로 선수들을 윽박지르려고 하기 보다는 한발 물러나서 선수들을 바라봐준다면 선수들이 알아서 깨닫습니다. 또한 이런 강압적 상황에서는 창의적인 플레이나 창의적인 선수가 나오기가 힘들겠죠, 물론 저는 그런 위계 질서적인 환경이 팀의 결속에는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팀에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안 좋은 점들을 제가 지도자가 되어서 꼭 바꿔야겠다고 생각 했던 점이 ‘아버지 리더쉽’ 할아버지 리더쉽‘의 원천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3 최덕주 동문의 그때 그 시절.

 

*최덕주 동문의 어린시절

최덕주 동문은 어렸을 적부터 축구를 좋아했냐는 질문에 “중학교 3학년 당시 키가 148㎝밖에 되지 않아 고등학교 팀에 진학하지 못하고 유급을 해야 했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너무 좋아해 과도하게 운동을 한 탓에 무릎 관절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년의 유급 끝에 어렵게 진학한 고등학교 팀에서는 무릎 부상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는 그때 당한 무릎 부상 때문에 여러 차례의 수술을 받는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끝내 중앙대학교 진학을 이뤄낸 그는 또 다시 축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된다.

 

*최덕주 동문의 대학 시절.

최덕주 동문은 대학 시절을 묻는 우리의 질문에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당연히 축구하러 입학했으니까 축구만 알고 학교를 다녔죠”라고 말했다. 이어서 학창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묻자 그는 역시나 축구와 관련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제가 입학 할 당시 학교에 훌륭한 선수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시합이 있을 때 다른 학교는 3,4학년이 주축이 되었지만, 우리 중앙대 축구부는 1,2학년만으로 팀을 꾸려 시합에 나가도 전혀 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승은 실력만으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항상 4강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어요. 제가 선수로 뛰던 재학 시절에 최고 성적이 준우승이었습니다.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한 거죠. 그런데 제가 졸업하고 나서 바로 그 다음 해에 후배들이 우승을 하더라구요.(웃음)”

 

*j졸업 후의 최덕주 동문

최덕주 동문은 졸업 후 한일은행과 포항제철 등 프로무대까지 올라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1986년 독일 진출을 시도하지만 계약을 앞두고 에이전트가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그의 독일 진출은 물거품이 됐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실업팀 선수로 잠깐 뛰고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선수 생활을 관두고 지도자 수업을 받게 된 것은 고질적으로 그를 괴롭혀 오던 무릎부상이 심해져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덕주 동문은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일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그가 한국과 일본, 북한 국적 선수들로 구성된 오사카 조선고를 처음으로 전국대회 본선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서 14년간 지도자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갑자기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는 국적 때문이었다. 최덕주 동문은 "오사카선발팀이 일본 전국체전에서 우승한 후 오사카축구협회장이 한국인이라 지원을 못하겠다고 말해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시련에도 단련이 됐다는 최덕주 동문은 "지금은 언제 어디서든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며 "인생에 시련은 많았지만 지금 난 훌륭한 선수들을 만나 최고의 영광을 맛봤다. 그게 바로 인생인 것 같다"고 웃었다.

 

#4. “축구는 내게 너무 고마운 대상“

축구를 향한 최덕주 동문의 남다른 사랑.

 

최덕주 동문은 축구를 시작한 것을 후회 해 본적이 없냐는 질문에 “내 딸들도 축구선수를 시키고 싶을 만큼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아들이 있었으면 재능과 상관없이 무조건 축구 선수를 시켰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축구는 내 인격을 형성시켜주었고, 내게 많은 추억을 주었다. 즉 축구가 나의 모든 것을 형성 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는 내게 너무 고마운 대상이다.”며 남다른 축구 사랑을 과시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끝까지 유소년 선수들의 육성에 힘을 쏟고 싶다. 나는 어린 인재들을 발굴하고 교육하는 것이 즐겁다. 어린 선수들을 교육하는 일은 젊고 도전정신이 넘치는 감독보다는 경험이 많고, 연륜이 있는 감독들이 더 적합하다고 본다. 하지만 꼭 감독직이 아니더라도 나는 어떤 식으로든 한국 축구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총장님과의 식사자리가 생기면 우리 중앙대학교에도 여자 축구팀이 개설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을 넌지시 말씀드려보아야겠다”며 모교와 여자 축구 발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5 중앙인들에게 전하는 말.

 

최덕주 동문은 중앙인들에게 다른 무엇보다 “긍정의 힘”을 강조했다. 그는 이번 우승 역시 긍정의 결과물이었다고 말하며 “최악을 생각 말고, 최선을 다하라. 문제를 철저히 분석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면 결과는 따라 오는 것이다. 승부에서의 실패를 두려워 말라. 무엇보다 자신에게 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승리는 끝까지 도전하는 자에게 온다. 이 자세만 잊지 않는다면 우리 중앙대 동문들 모두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고 전했다.

              

 

최덕주 동문은 “모교 동문이니 특별히 더 잘해주고 싶다”며 바쁜 인터뷰 일정에도 불구하고 수십번도 더 받았을 같은 질문에 성심성의 것 답변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답변에 있어 본인 보다 타인을 높이는 “배려”와 “겸손함”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세계를 재패한 힘이 나온 것이었을까. 인터뷰 내내 아버지와 대화하는 듯이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신 최덕주 동문께 감사드린다.

 

 

 

취재 : 홍보대사 박준영(신문방송학과)/배성현(경영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