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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연금술사 박상연 동문(영어학과 91학번)을 만나다

관리자 2010-01-22 조회 5808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하셨습니까..?

사람을 얻는 자가 시대의 주인이 된다 하셨습니까?

폐하, 보시옵소서.

폐하가 아닌 미실의 사람입니다.

이제 이 미실을 대적할 자는 없사옵니다.

이젠..

이 미실의 시대입니다."

 

 

미실의 이 명대사처럼, 지난 2009년은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덕만과 미실의 왕위를 둘러싼 암투를 지켜보며 함께 울고 웃었다. 드라마는 특성 있는 캐릭터와 치밀한 스토리 전개로 우리 국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시청률 40%를 넘는 선덕여왕의 인기는 드라마가 종영된 후에도 책으로, 뮤지컬로 분야를 넓히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2009년을 강타한 이 ‘선덕여왕’ 신드롬의 중심에 바로 우리 학교 동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가? 바로 선덕여왕의 작가 박상연 (영어학과, 91학번) 동문이 그 주인공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우리 모교를 사랑하는 마음에 흔쾌히 응해준 인터뷰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도심의 칼바람에 겹겹이 껴입은 옷들이 무색하던 1월의 어느 날, 어렵게 박상연 동문의 작업실 주소를 알아내어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을 찾았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은 무작정 알고 있는 주소를 연신 스피커폰에 입력을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던 찰나, 옆으로 낯익은 얼굴이 휙 스쳐 지나갔다. 바로 박상연 동문이였다. 정말 우연히도 그 시간에 박상연 동문이 작업실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필연적인 만남 덕에 두 번의 인터뷰를 가지게 되었고,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연신 내가 누른 스피커폰의 주소는 잘못된 주소였다)

 

 

 

# MBC 연기대상 <올해의 작가상> 수상

 

연말이 되면서 여러 매체를 통해 박상연동문의 수상 소식을 볼 수 있었다. 특히 2009년 MBC 연기대상에서는 ‘선덕여왕’을 공동 집필한 김영현 작가와 함께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저는 원래 ‘상’이라는 것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수상은 드라마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교감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후 달라진 점을 물었다. 그는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여유’라고 대답했다.

 

“선덕여왕을 집필하는 동안에는 너무 바빠서 주변의 가족,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만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작품의 성공으로 인해 그 동안의 소중한 인연을 잃어서는 안되니까요. 이건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합니다.”

 

 

# 반공 글짓기의 신동

 

오늘의 박상연 동문이 있기까지 그의 과거는 어떠했을까. 그의 학창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사실 저는 불량학생에 가까웠습니다. 사고를 치고 다녔다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요구하는 말 잘 듣는 우등생 타입이 아니었던 거죠. 그때는 학교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 보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 멋에 살았던 것 같네요.”

 

그 하고 싶은 일이 뭐였냐는 질문에, 예상외로 ‘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 춤 추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당시엔 브레이크 댄스라 불리는 춤이 유행이었는데, 요즘 비보이들이 추는 춤의 할아버지 격인 춤이죠. 우리 학교엔 뛰어난 춤꾼들이 많았었는데, 그 중엔 강원래씨의 부인인 김송씨도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음악을 매우 좋아하지만, 그 당시 저는 춤추는 것, 그룹사운드 등 음악에 빠져있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했던 소년? 그렇다면 작가로서의 꿈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이었을까.

 

“작가의 꿈은 오래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것을 정말 좋아했는데, 소설이라는 말의 뜻을 알기도 전에 작가를 꿈꾸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꾸준히 글을 써온 것도 아니지만, 어릴 적 누구나 꿈꾸던 문학 소년의 모습을 저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막연하게 ‘글을 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된 데는 ‘반공글짓기’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초등학교에는 반공글짓기 대회가 많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큰 상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그는 계속해서 반공글짓기에 나가 큰 활약을 보이게 된다.

 

“‘스승의 날 백일장’ 이런 곳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유독 반공글짓기에서만큼은 강했어요. 사실 지금도 그 때의 글을 읽어보면 깜짝 놀랍니다. 초등학교 5학년에게 이런 증오와 적개심이 어떻게 있었을까, 사고가 주입된 상태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게 끔찍하게 느껴졌죠. 요즘의 제 글의 성향을 볼 때는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공글짓기를 썼던 경험 덕분에 소설 ‘DMZ’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쓸 수 있었습니다.”

 

# ‘세대’를 풍미한 ‘불꽃’ 남자 박상연

 

그에게 중앙대학교 재학 시절은 어떠했는지 묻자, 이번에는 연극이 등장했다. 아니, 내가 인터뷰하고 있는 사람이 종합예술인 이었던가.

 

“처음부터 연극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 이후 다쳐서 한 달간 학교를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친구가 없었는데, 한 친구가 동아리 하나 같이 하지 않겠냐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동아리를 들면 혼자 밥 먹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연극부에 들게 되었죠. 시작은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작했지만 아마 나의 대학생활의 대부분은 동아리와 함께였습니다.”

 

그가 활동했다는 동아리는 민족극 동아리인 ‘세대’이다. 쉽게 말해 운동권 연극동아리라고 볼 수 있다. 박상연 작가가 입학한 91년 즈음은 시대가 혼란스러워 정권에 반대하는 많은 학생들이 시위를 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연극 또한 현실에 비판적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미래회상’이라는 창작극을 썼어요. 당시 92년 대선에서 민자당이 재집권해서는 안 된다는 다분히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연극이었습니다. 집행부였던 나는 ‘미래회상’을 무대에 올렸고, 학우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치적 내용으로 인한 위험이 있었겠지만, 그때는 용감했던 것 같아요.”

 

 

이런 열정적인 대학생활 중에도 그가 빼놓지 않고 챙겼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연애다.

 

“세대를 하면서 학회를 하나 만들었었습니다. '불꽃'이라는 학회였는데, 주로 사회과학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이 동아리에서 만난 93학번 후배와 비밀연애를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동아리의 회장이 부원과 연애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있어서 졸업 때까지 비밀로 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연애 했었죠.”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불꽃’이라는 동아리에서 ‘불꽃’같은 사랑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 해본다.

 

# 작가의 길로 이끌어 준 이문열 작가

 

“저는 대학시절동안 계속해서 신춘문예에 출품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심 통과조차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95년 8월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할 것인지 계속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인지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일단 취업을 하고 나서 글을 쓰자!’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열심히 써 보자는 마음으로 졸업 후 반년을 집필에만 몰두했습니다. 쓰다 보니 장편이 되어버려서 기성작가와 경쟁해야 하는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 부문에 응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대를 접고 취업을 준비하던 중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여보세요, 소설가 이문열이라고 합니다.

 

“네. 그 분은 정말 이문열 선생님이셨습니다. 믿어지지 않아 계속해서 누구시냐고 물었죠.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게 되더군요. 이문열 선생님께서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을 보았는데 아마 금요일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귀뜸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꿈같은 일주일이 지나고... 그런데 막상 금요일에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토요일이 되어서야 이문열 선생님께서 전화가 와서 다른 두 심사위원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수상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어요. 오히려 저보다 더 안타까워하시며 저를 부르셨습니다.”

 

상은 중요하지 않다. 신인에게 그것은 매우 크게 느껴지겠지만, 그것은 출발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문열 선생님덕분에 민음사 세계문학이라는 계간지에 추천을 통해 등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처녀작 ‘DMZ’였습니다. 이듬해 단행본이 나오고 그렇게 저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문열 선생님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저였지만, 저의 작품을 인정해주시는 모습에 인간의 그릇의 크기를 느꼈습니다. 그런 위치에서도 다양성을 존중하고 열린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을 만나기는 쉽지 않거든요.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 소설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드라마로

 

    

 

그의 자취를 쭉 살펴보면 과연 그의 주 활동무대가 어디인지 의심스럽다. 97년 소설 「DMZ」,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2007년 영화 「화려한 휴가」, 2007년 드라마 「히트」,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까지. 박 동문은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소설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드라마로 활동분야를 넓히고 있었다.

 

“DMZ는 우연치 않게 영화화 되었습니다. 이전에 많은 감독들이 연락이 왔지만 흐지부지 되었었죠. 그러다 명필름의 이은 대표님께 연락이 왔고, 박찬욱 감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박찬욱 감독님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정을 고민하던 찰나에 그 당시 영화 매니아들에게는 성전으로 여겨지던 '비디오 드롬' 이라는 책의 저자라는 말을 듣고 저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영화가 바로 ‘공동경비구역 JSA’였습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저는 자연스럽게 영화계로 넘어오게 되었죠.”

 

소설을 쓰던 그가, JSA라는 영화 한 편을 계기로 그는 충무로의 기대주가 되었고, 그 스스로도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서 매력을 느끼게 된다. 혼자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소설과 달리,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 회의를 하고, 모니터링 하는 상호작용적인 작업들이 소설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었던 것이다.

 

“이후에 영화의 매력과는 또 다른 드라마의 매력도 알게 되었습니다. 김영현 작가님과 회사를 설립하고 회의, 공동 집필 시스템을 만든 이유도, 영화를 하면서 느낀 공감의 짜릿함 그 카타르시스를 재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드라마는 집필진 외에도 배우, 시청자들과 교감을 바로바로 나눌 수 있는 영역입니다. 저희가 대본을 집필하면 다음 주에 바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100점짜리 대본을 주었다고 가정했을 때 고현정씨 같은 경우는 120짜리 연기를 만들어냅니다. 이런 교감들이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저는 일의 행복을 쫓아와 지금 이곳까지 이른 것 같다고 생각해요.”

 

# KP&SHOW! 김영현, 박상연 쇼를 만들다!

 

그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선덕여왕을 공동집필한 김영현 작가를 떼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드라마 ‘히트’라는 작품을 첫 계기로 작가회사인 KP&SHOW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드라마 업계에서 회의나 공동집필과 같은 시스템을 추구하고 있다. 김영현 작가와의 인연은 어떻게 이어졌을까.

 

“2000년 JSA가 개봉 후 흥행하고 있었던 시기에,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우연히 김영현 작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영현 작가님은 ‘대장금’을 하기 전 다른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김 작가님을 처음 알았고, 김 작가님 작업실도 저와 가까운 여의도에 있다 보니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곳은 작가나 제작가들 사이에서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었거든요. 어느 날 김영현 작가가 다음 작품으로 장금이라는 의녀를 다루겠다는 언급을 하였고 그것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1주일에 한 번씩 회의에 참여하기로 했고, 이 과정을 거쳐 그렇게 ‘대장금’이라는 드라마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끈 대장금의 보석 같은 숨은 조력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토론을 거치다보니 회의를 통한 공동 집필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이 생겼고,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히트’라는 드라마를 처음으로 같이 집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토록 궁합(?)이 잘 맞는 이 두 작가의 회사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을까.

 

 

 

“저희의 목표는 체계가 잡혀있는 드라마 대본 집필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것과, 유망한 드라마 작가를 양성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먼저 한국의 드라마 제작 시스템은 너무 불합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1주일에 보통 70분짜리 2편, 즉 140분 분량의 대본을 혼자서 쓴다는 것은 정말 살인적일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드라마의 기획, 집필, 감수, 각색 등 각기 다른 여러 과정에 능력 있는 분들을 모으고, 또 전체적인 틀을 잡아 줄 Creator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변화를 통해서 좀 더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신인들을 발굴해서 키우는 것도 우리 회사의 장기적인 목표입니다.”

 

# 선덕여왕, 못 다한 이야기

 

2년의 준비기간, 7개월의 방송기간의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 하고 그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어요. MBC 월화 대하사극은 특히나 부담이 큰 자리에요. 다행이 시청률도 잘 나오고 완성도 측면에서도 호평을 받아 정말 감사한다는 말밖에 드릴 말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50부작이었는데 62부로 연장을 하면서 끝부분에 작가들의 준비가 부족했던 점이 아쉽습니다.”

 

“사실 집필 당시에는 내용이 좀 어렵다고 생각해서 이만큼의 인기를 얻을 줄은 몰랐습니다. ‘영화는 고2, TV 드라마는 중2, 광고는 초등2학년 수준에 맞춰라’ 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기대를 낮췄었는데 이번에 결과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특히 29부 엔딩에 미실과 덕만의 ‘6분 토론’ 이라는 장면이 있는데, 이걸 쓰고 나서 우리는 채널이 다 돌아갈 줄 알았어요. 이 프라임 저녁타임에 누가 지루하게 이걸 보겠냐고 말이죠. 그런데 예상외로 시청률이 거기서 폭발적으로 올라갔고, 게시판에서도 6분 토론에 대한 관심이 높더라구요. 그래서 이번 드라마를 계기로 ‘드라마는 이래야 한다.’는 정설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덕여왕이 끝나고 아무 생각 없이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싶으나 남은 회사일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하는 박상연 작가. 현재 회사에서 두 번째 작품을 준비하고 있으며, 올해나 내년 쯤 그가 시나리오 작업을 한 영화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 인생 선배로써 한 마디.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동안 박상연동문의 39년간의 버라이어티 했던 인생이야기를 들은 후, 그의 다채로운 인생에서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라는 실로 엄청난 내용을 무릎팍 도사가 질문하듯 가볍게 한번 물어보았다.

 

“글쎄요. 인터뷰를 많이 해 보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네요. 저는 원래 소설가로 시작을 했기 때문에 소설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영화, 드라마, 한창 음반시장 전성기 때는 뮤직비디오도 했었던 제 커리어를 보면 의심스럽지만, 저는 작가로서의 꿈을 아직도 가지고 있거든요. 작가로써의 꿈의 종착지는 바로 제 이름으로 된 삼국지를 쓰는 것. 삼국지는 작가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재해석되는 명전이잖아요. 저도 박상연의 삼국지를 한번 집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아, 이건 얼마 전에 생긴 작은 소망인데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라디오 DJ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하루에 두 시간 정도 청취율이 너무 치열하지 않은 자리에서, 많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과 깊게 교감하며, 음악을 나누고 싶어요.

 

소설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했던 그의 학창시절이 고스란히 투영된 목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좇아서 현재를 살고 있다는 그. 마지막으로 우리학교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마디 남겨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혹시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이 있다면, 말리고 싶습니다. (하하) 이건 농담이고요, 드라마나 영화계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재미있고 멋있는 직업이긴 하지만 그만큼 힘들고 치열한 곳입니다. 지상파 드라마 업계의 수요를 한번 생각해 보면 전국 30등 안에 들어야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만큼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작가로써의 꿈을 가졌다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시작하세요. 다른 어떤 일도 피차 마찬가지이겠지만 요.

 

대학생 시절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시기입니다. 제가 신춘문예에 매번 낙방하고도 마지막 소설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처럼 여러분도 그 노력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기회가 있을 겁니다. 희망을 가지고 행복을 좇아서 노력하세요.”

 

“진심을 다하면 내가 바뀌고, 내가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위 대사는 선덕여왕 7화에서 소녀시절의 천명공주가 수련에 몰두하는 유신에게 그의 고집과 우둔함을 탓하자 김유신이 한 말이다. 박상연 동문의 인생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대사가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쓰기 그것 하나에 정직하게 진심을 다 하였기에 박상연 동문이 지금 자리에 위치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드라마로 활동분야를 옮기며 확장해왔지만 어린 시절 순수하게 글 쓰는 것이 좋아 반공글짓기에 몰두하던 문학소년 박상연의 본질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덕여왕 종영 후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위하여 귀한 시간을 내준 박상연 동문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앞으로 나올 그의 작품이 모두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취재 및 촬영 : 홍보대사 이인영 (광고홍보학과), 최세연(신문방송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