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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이끄는 국가대표 석학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식품공학부 85학번 하상도 동문을 만나다

관리자 2024-02-07 조회 1031

대한민국을 이끄는 국가대표 석학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식품공학부 85학번 하상도 동문을 만났습니다.



PART 1. 대한민국을 이끄는 국가대표 석학,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하상도


Q1.     최근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최고 석학기관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정회원으로 선출되는 큰 성과를 이루셨습니다. 선정되신 소감과 더불어 한림원이 어떤 기관인지 간략히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과학 강국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과학기술 석학기관 한림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하 한림원)이 그 역할을 합니다. 한림원 정회원은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연구와 자문을 수행하고 국제학술교류 협력에 앞장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올해 신규 한림원 정회원 선발 결과 농수산학부 정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가치 있는 일에 동참하게 돼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학자에게 ‘한림원 정회원’이라는 타이틀은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림원은 국가에서 인정한 법적 기관으로 과학기술 각 분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학자들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한림원 정회원이란 성과는 4전5기 끝에 얻은 소중한 기회이자 영광입니다.

현재 한림원에는 정책학, 이학, 공학, 농수산학, 의약학 등 5개 학부의 세계적인 석학 1000여 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회원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와 위치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이끌어가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중 정회원은 486명이며, 종신회원, 외국인 회원 등이 578명입니다. 저도 다른 회원분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기초과학 연구, 인재양성 및 교육, 과학기술 정책 제언 등 다방면에서 활동할 계획입니다.

 

Q2.     한림원 정회원 선출이란 명예를 안겨 주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교수님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식품의 안전성, 규제를 탐구하는 과학자입니다. 주로 생물학적 위해요소의 검출과 진단, 제어에 연구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식품위해미생물 생육특성 및 제어연구를 진행해 오면서 오염된 식품이나 식품작업 표면에서 세균을 제어하는 화학적, 물리적 살균법을 개발해 왔습니다.

한림원 정회원 선출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핵심연구가 있습니다. 식품 위해 및 부패세균의 생물막(biofilm) 형성 특성을 유전학적, 분자생물학적, 생리학적으로 연구한 것입니다. 생물막 생성을 예방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쿼럼센싱(quorum sensing, 세균 간 정보교환) 유전자나 생리적 제어법을 연구했습니다. 또한 이미 생성된 생물막을 제어하기 위해 화학적 처리나 효소,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 대사산물,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 효소 등 생물학적 처리 그리고 UV 등 물리적 처리를 활용하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음식이 묻은 식기를 식사 후에 바로 설거지하지 않고 방치해두면 표면이 미끌미끌해지는 걸 경험해 보신 적 있을 것입니다. 세균이 증식해 막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명칭이 생물막이고요. 저는 생물막을 형성하는 식중독 세균과 식품 부패균의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세포막에 상처를 입혀 생물막이 형성되는 것을 막거나 세균을 죽여 안전을 확보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식품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Q3.     한림원에서 정회원이 되기까지 활동하시는 과정에서 있었던 다른 연구자들과의 교류가 교수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수많은 연구자와 지속해서 교류를 이어온 것이 제가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소중하고 감사한 인적 네트워크였죠. 나아가 그 교류는 제가 한림원 정회원으로 선출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한림원 정회원을 선발하는 일련의 절차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가 분과별 전문 심사입니다. 제 분과는 농수산학부입니다. 심사위원은 제가 30년 가까이 교육자, 연구자 생활을 해오면서 한 번쯤은 함께 연구했거나 만난 적이 있는 분들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연구를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들인 거죠. 일종의 동료평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당 단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한림원 정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평소 학회, 교내 활동 연구활동 그리고 사회활동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합니다. 평소 행실도 중요한 평가 요소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성실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겠죠.

 

Q4.     차후 한림원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실 생각이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한림원 정회원 중 평균 연령을 고려했을 때 젊은 그룹에 속합니다. 그래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활동적인 역할들을 수행할 계획입니다. 각종 행사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석할 것이고, 운영위원회 활동도 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과학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더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식품의 안전성을 탐구하고 규제하는 교육자이자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칼럼니스트입니다. 지금까지 식품과 관련된 칼럼을 총 1,000여 편 작성했습니다. 한림원의 주요 역할 중 하나가 과학의 대중화라는 점에서, 지금이 제 역량을 더 발휘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일반 국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과학기술을 쉽게 와닿을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터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 정부 자문 활동을 활발히 함으로써 국가 정책 발전에도 기여하고자 합니다.

 

PART 2. 식품공학 권위자, 파워중앙인 하상도


Q1.     식품 전문가 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자이신데요. 처음 식품공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에 진학할 당시만 해도 식품공학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그저 화학과 생물을 좋아하고 잘하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꿈꾸며 전공을 알아보던 중 식품공학을 알게 됐습니다. 화학과 생물을 응용하는 학문이더라고요. 그렇게 식품공학에 입문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것을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서를 쓰는 그 순간에 많은 과 중에서 식품공학이 제 눈에 보였다는 것, 큰 인연 아닌가요? 감사하게도 식품공학이 제 적성에 맞아서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Q2.     식품공학의 다양한 연구분야 중에서도 식품 안전성을 전공하셨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석사를 공부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식품 안전’이라는 전공은 없었습니다. 당시우리나라는 식품의 안전에 신경을 쓸 여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식품 안전은 주로 음식을 수출하는 나라에서 먼저 발달하는데, 우리나라는 음식을 수입하는 나라였기 때문이죠. 따라서 국내에 식품 위생, 식품 안전 관련 연구실은 없었고 식품 화학, 식품 미생물, 식품 가공학과 같은 연구실만 있었습니다. 저 역시 석사 공부를 할 때까지 식품 미생물 연구실에 있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미국에 갔습니다. 식품 미생물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식품 미생물은 미생물을 활용해서 요거트, 술 또는 장류와 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막상 미국에 가보니 압도적인 비율로 식품 안전과 관련된 미생물을 연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식품을 국외로 대량 수출하는 나라였기 때문이죠. 식품 안전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중앙대에서 전공한 알코올 발효 식품 미생물은 미국 등 선진국 식품공학에서는 마이너 부류에 속해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 텍사스 A&M 대학교 지도 교수님과 연구실의 영향을 받아 식품 안전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때쯤 한국에서 식품 안전에 대한 열풍이 조금씩 불기 시작하더라고요. 유학을 마치고 보건복지부 출연기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식약처(당시 식품안전본부, 식약청)가 만들어졌고, 대학교에도 식품 안전 전공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우연히 식품 안전의 선두 주자로 활동했습니다. 워낙 일찍 미국에서 교육받고 와서 경쟁이 덜했던 것도 있습니다. 제 운이죠. 식품 공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운명이고 미국 유학을 통해 식품 안전을 접하게 된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Q3.     오랜 식품공학 연구 활동 과정 중에서 특별히 보람을 느꼈던 경험이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실까요?

방글라데시 국적을 가진 대학원생들과 함께 연구했던 경험이 기억에 남습니다. 2010년 9월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한 교수가 학생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과 함께 제가 지금도 하고 있는 생물막 연구를 심도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 연구실을 거친 박사 학위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석사 학위생을 배출해 저에게 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교수부터 공무원까지 꾸준히 제 연구실을 찾아오고 있고, 지금까지 제 연구실에서 10명의 방글라데시 출신 박사 학위생을 배출했습니다.

그 학생들은 대부분 본국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활동 중이며, 그런 모습을 볼 때 보람과 뿌듯함을 느낍니다. 저는 그 제자들과 함께한 경험 덕분에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를 좋아하고 신뢰하게 됐습니다. 방글라데시 학생을 만난 게 교육자, 연구자로서 큰 터닝 포인트였고, 깊이 있는 연구를 할 수 있게 된 계기였습니다.

 

Q4.     연구성과가 실제 우리의 삶과 사회를 바꾸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이 있으신지, 그럴 때 연구자로서 어떤 기분이 드시는 지 궁금합니다.

제가 연구하는 식품 안전은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제가 규명한 세균, 바이러스의 원인, 식중독 관련 제어법으로 사람들이 식중독을 예방하고, 식품을 안전하게 먹을 때 보람을 느낍니다.

식품 안전 규제 정책에도 기여를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통기한이 소비기한으로 바뀐 것과 냉장도 온도를 10도씨에서 5도씨로 낮추고자 제안한 것이 있습니다. 선진국은 냉장고 온도를 대부분 5도씨로 유지하고 있기에 우리나라가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냉장고 온도를 5도씨로 맞출 필요가 있었습니다. 작은 변화이지만 우리나라 경제 나아가 국민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끼친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나라 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치는 연구를 이끌어낼 때 뿌듯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아스파탐과 라면 발암물질과 같은 새로운 이슈가 떠오를 때 소비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방송에 출연하거나 기고문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팩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깊이 있는 연구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때도 보람과 행복을 느낍니다.

 

Q5.     문화일보 ‘하상도 교수의 식품 오디세이’, 식품음료신문 ‘하상도의 식품 바로보기’ 등 언론을 통해 다양한 기고/연재 활동을 진행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토록 활발한 언론 활동을 선보이시게 된 이유를 여쭙습니다.

앞서 말했듯 저의 또 다른 직업은 칼럼니스트입니다. 교수가 되고 나서 신문사 요청에 따라 몇 번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칼럼을 작성하기 시작한 때는 교수생활 6년 차를 마치고 7년 차가 될 때 2010년도에 연구년을 갔습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로 갔는데요.

그때 그간 달려온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교수로서 터닝포인트가 됐는데 내가 교수로서 어떻게 더 발전할 수 있을까? 깊이 있는 연구 말고도 내가 무언가를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칼럼니스트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식품음료신문 주간지 사장님에게 “전세 좀 내주십시오”라며 칼럼을 작성할 지면을 내줄 것을 요청 드렸습니다. 제가 오퍼를 했던 것이죠. 그렇게 기회를 얻어 원고를 쓰면서 시작한 것이 14년이 넘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많은 공부를 하게 됐고 저를 알릴 수 있었습니다. 칼럼 내용이 대학 강의로 이어져 질 높은 강의를 진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제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능력도 기를 수 있었고요. 앞으로도 과학기술 정보와 지식을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과학기술로 국가와 국민을 이롭게 하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대중의 과학적 소양과 과학 문해력을 함양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Q6.     식품공학 분야를 연구하시면서 정부 정책/지원책 등 아쉬움을 느끼신 부분은 없으셨을까요?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크게 바라는 점은 없습니다. 현재 식품공학이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거든요. 경제가 성장하고 산업이 좋아지다 보니 식품 안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높아졌습니다. 실제로 ‘식품’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있는 정부 부처가 식약처, 농림축산식품부로 두 개가 있을 정도로, 식품공학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연구와 교육 여건도 예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고요.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기업들도 여력이 생겨 식품 안전 연구나 교육에 투자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식품 안전이 때를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는 해당 분야가 선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에서 식품 안전이 주목받고 핫이슈가 된다면 정부의 지원은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PART 3. 학생 시절을 거쳐 교수까지… 중앙가족 하상도


Q1.     학사/석사 시절은 물론 교수로 강단에 서기까지 교수님은 항상 중앙대학교를 선택하셨습니다. 교수님의 선택이 한결같이 중앙대학교였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때 사촌 매형이 중앙대학교 출신으로 대전 목원대 교수였는데, 모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홍보대사가 된 것처럼 저에게 중앙대학교를 자랑할 만큼 애교심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분이 그렇게 멋져 보이더라고요. 학부 생활을 한 모교에서 강한 애교심을 갖고 교수 생활을 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분의 영향을 받아 중앙대학교를 알게 됐고, 중앙대학교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중앙대학교 식품공학부 합격 소식을 듣고는 ‘나는 사촌 매형의 뒤를 이어서 중앙대학교 식품공학부에 갈 것이고, 이 과의 교수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입학식 날 학교 교문을 쳐다보고는 마음속으로 ‘나는 이 학교의 교수가 될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입학하고 나서도 사촌 매형은 저의 멘토였습니다. 그분처럼 되고 싶었고 여러 조언을 통해 교수가 되기 위한 준비를 1학년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학점을 챙겼고 유학을 준비했습니다. 덕분에 1학년 때부터 플랜을 짜고 열심히 살 수 있었죠.

 

Q2.     교수님의 학부생 시절이 궁금합니다. 교수님은 어떤 학생이셨는지, 동아리/학회 등 대학생활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셨는지, 학부생 시절 주된 관심사는 무엇이셨는지 여쭙습니다.

저는 지금 돌아보면 되게 계획적이고 꼼꼼한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다이어리가 아직 있는데요. 일간, 주간, 월간 계획을 세우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했더라고요.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교수가 되기 위해 학점 관리를 잘할 필요가 있었고 유학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제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2학년 때는 식품 미생물 연구실에 들어가 교수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저와의 약속은 꼭 지키려고 했던 것 같아요.

덕분에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단과대학 학술상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교수가 되고 나서도 중앙대학교에서 학술상을 두 번째 받았습니다. 제 꿈을 이룬 것이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합창반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합창반을 통해 사람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합창은 튀면 안 되거든요. 독창은 튀어야 하는데 합창은 내가 튀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목소리를 크게 내지만 그 안에 녹아 있어야 해요. 이처럼, 공부 외에도 친구들과의 교류를 위해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하고 그 안에서 배움을 찾으려고 한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Q3.     학부생 시절 가장 기억에 남은 강의나 이외 활동이 있으신지요?

1학년 여름방학 때 한 달간 전국 일주 여행을 했습니다. 배낭을 메고 했는데요. 경남 마산을 시작으로 대구를 거쳐 강원도 춘천으로, 그리고 서울로 이동해서 다시 전라도, 제주도까지 돌아왔던 경로가 아직 기록으로 남아있더라고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습니다. 그냥 대학생 때 해보고 싶었습니다. 제 대학 버킷리스트였죠. 대학생 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Q4.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생명공학 분야 명문대학 미국 텍사스 A&M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셨습니다. 해외에서의 박사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없으실까요?

미국에서 테니스를 배운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미국은 운동을 하고 악기를 다뤄야 사람다운 삶을 사는 거더라고요. 공부만 하는 건 짐승이지 사람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저는 테니스를 했습니다. 실제로 운동을 하니까 체력적으로도 도움이 됐고 학업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체력이 안 되면 연구에 집중할 수가 없거든요.

테니스를 복식으로 치면서 인생을 배웠습니다. 합창과 비슷한데 복식은 혼자서 특출나서는 시합에서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화합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파트너와 잘 맞춰서 그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서포트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조화와 희생, 헌신을 배웠던 것이죠.

그리고 미국에서 한 학기 하고 돌아와서 결혼했습니다. 와이프는 중앙대학교 후배입니다. 중앙대학교는 저에게 많은 기회를 준 소중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죠. 박사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학기마다 방학 때 여행도 다녔습니다. 미국은 땅이 크니까 학회를 뉴욕, 플로리다, 미시건, 시카고 등 여러 곳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학회를 다니면서 자연스레 자동차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미국 일주 여행을 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학교 출신 전공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난 것이 저에게 소중한 자산이 됐습니다.

 

Q5.     많은 학생들이 연구자/교육자의 길을 꿈꾸는 과정에서 해외 유학을 고민하곤 합니다. 이러한 우리 중앙대 후배이자 제자들에게 해외 유학에 대한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추천합니다. 제 연구실에서도 박사까지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있으면 첫 번째로 해외유학을 권하고, 두 번째로 제 연구실을 권합니다. 큰 나라에 가면 확실히 우리나라와는 다른 시스템이 있고,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집니다. 미국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대국이고, 그렇기에 배울 수 있는 게 많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로서 성공하려면 영어가 기본입니다. 논문도 영어로 쓰고, 해외 학회에서도 영어로 소통하거든요. 그래서 영어를 하는 나라에서 박사 공부를 하는 것은 추천해 드립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이공계 학생들은 유학 비용이 거의 안 듭니다. 지원되는 장학금과 연구비가 많거든요.

그렇지만 국내도 현재 제가 석사를 했을 당시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실험실과 연구 수준이 미국과 가까워졌습니다. 격차가 많이 줄었어요. 국내 박사도 미국 박사 정도의 논문을 쓰고 실험 시설이 평균적으로 비슷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디서든 배움의 자세만 있다면 충분히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Q6.     배움에 있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 배울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배울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겐 어떤 우수한 교육도 효과가 없습니다. 가르침은 학생이 간절하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효력을 발휘합니다.

두 번째로, 배우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는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소한 배움이라도 받아들일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많이 배웁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거든요. 모든 사람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그런 겸손함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약속을 지켜라’입니다. 남은 기본이고 자기와의 약속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이어리를 작성했는데요. 다이어리에 내가 할 일을 쓴다는 거 자체가 오늘 그 일을 하겠다는 저와의 약속이기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공부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면 되거든요. 비교할 필요 없어요. 제가 교수가 되기 위해서 저는 논문을 쓰면 됐습니다. 논문 쓰는데 누구하고 경쟁하지 않습니다. 제가 잘 쓰면 되는 거거든요. 나중에 평가는 둘이 쓴 논문 결과를 비교한 것뿐입니다. 내가 성과를 만드는 데 상대는 저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어요. 약속을 지키는 습관이 배움에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Q7.     뛰어난 연구성과를 내며 한림원 정회원에 선출된 과학자, 우수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자로 계속 발전과 성장을 거듭해 오셨는데요. 향후 목표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느덧 연구 생활을 한 지 30년 차가 됐고, 앞으로 10년 정도 더 남았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한다기보다는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유지하면서 활동의 범위를 넓혀가려고 합니다. 현재 하고 있는 연구, 그리고 사회활동을 조금 더 강도 있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해 오던 걸 탄탄하게 하고 싶습니다. 칼럼도 계속 쓸 것이고, 정부와 학회에서 자문 역할을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기업체, 소비자단체 자문도 물론이고요. 교육과 연구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라톤으로 보면 이제 마지막 10Km입니다. 여기서 치고 나갈 거냐 아니면 유지할 거냐, 만약 제가 현재 꼴지라면 치고 나가겠지만 지금은 선두 그룹에 있기에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완주하고 싶습니다.


취재 / 글 / 사진

중앙사랑 31기 서정호(사회복지학부 3학년)

중앙사랑 31기 이연주(국어국문학과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