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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농구대통령, 허 재 동문(체육교육 84학번, 現 KCC 및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관리자 2009-07-27 조회 6065

“허재의 등장으로 한국 농구에는 ‘일대일’ (One on One) 개념이 확립됐다. 선수의 이름이 그대로 작전으로 통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감독이 타임을 걸어 복잡한 다이어그램을 그리는 대신 “허재에게 볼을 줘라. 그리고 허재, 넌 득점을 해라.” 는 식의 지시를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중국과의 대결이었습니다. 왼손잡이인 허재는 왼손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35득점 정도를 기록합니다. 그때 해설자와 캐스터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자국팀 선수이긴 하지만 ‘괴물’이라고. 당시 중국팀은 20여개의파울을 범합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허재선수가 나타나면 전담수비수가 나와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편 공격력은 떨어집니다. 또 허재선수를 방어하기 위해 수많은 파울을 범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상대는 위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허재 효과, 허재 효과란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대한민국 농구 대통령이라고 불리던 허재(체육교육 84, 現 KCC 및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감독에 대한 선수시절의 일화는 참으로 많다. 이러한 일화들은 청자로 하여금,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허재 감독이 선수로 뛰던 시절 그의 활약이, 그리고 그가 이끌던 대한민국 농구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2004년 마흔의 나이로 30년간의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현재 프로농구 팀과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고 있는 허재 감독은, “스타 출신의 감독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속설을 무색하게 하며, 감독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6월 10일부터 5일간 열린 동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전승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08~09시즌의 프로농구에서는 팀 KCC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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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른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전력차질, 짧았던 준비 기간과 같은 여러 악 조건 속에서도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고 운을 띄운 허재 감독은, 또한 선수들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게끔, 용기를 북돋아 주려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이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며 이러한 요인들의 우승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뿐만 아니라 허재 감독은 선수들 간의 팀웍에도 신경을 썼다고 한다.

  

5명의 베스트 선수 위주 보다는 열 두 명이 모두 하나가 되어, 단 1분을 뛰더라도 코트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자 노력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 선수들이 이러한 자신의 지도를 잘 믿고 따라와 주었기에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선수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더불어 힘든 상황속에서 그가 늘 선수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고 했다. 바로 “실패하는 것이 지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이 지는 것이다”라는 말.

  

“질 수도 있다, 져도 된다. 그러나 포기하지만 말아라. 내가 바라는 건 이 것 뿐이다.”라며,“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믿음만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선수들을 독려했던 것이 어느 전술과 어느 기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했다고 그는 말했다.

  

           

                              <KCC 사무실의 트로피 전시장>             <08~09 KBL 챔피언 결정전 우승 기념구>

           

               <08~09리그 우승 후 행가래를 받고 있는 허재 감독>  <우승을 기뻐하고 있는 허재 감독>

            

                                        <어느 트로피 보다 아낀다는 김연아 선수의 사인 슈즈>

 

 

대한민국 농구 대통령 허재의 농구 인생.

“선수시절부터 지금의 감독에 오르기까지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선배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게 더 어렵다고 하는데, 허재 선배는 해냈다.”는 김승현 선수의 말처럼 허재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감독직을 맡고 있는 현재까지 크고 작은 시련들을 극복해 나가면서도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다.

 

허재가 없는 농구와 농구가 없는 허재는 상상할 수 없었다는 말이 의미하듯, 농구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허재의 삶에서 농구는 허재 그 자체였다.필연의 시작은 우연에서부터라고 했던가. 우연한 기회에 농구를 접하게 되면서, 농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허재 감독(이하 허재)의 농구 인생 이야기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된다.

 

특별활동 농구반이었던 허재를 눈여겨 본 농구부 감독이 그에게 농구를 권유했고, 허재는 이를 받아들여 동북초등학교 농구부의 일원이 된다. 허재는 농구부에 입단한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출전하게 된 대회에서 팀을 준우승까지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승을 하지 못한 농구부는 학교 측 방침에 의해 없어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허재는 농구와의 끈을 놓을 뻔 했으나, 뭔가 되려니 인연이 이어지더라는 허재 감독의 회고처럼, 때마침 대회에서의 허재를 눈 여겨 본 상명초등학교 농구부 감독과 허재의 적성을 알아 본 아버지의 권유로 허재는 상명초등학교에서 농구를 계속 하게 된다.

이후 용산중학교에 입학한 허재는 본격적으로 농구수업을 받게 된다. 가족들 또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게 된다. 당시 미국에 거주 중이던 허재의 큰 누나는 연습에 보탬이 되라고 특별히 주문제작한 특수 안경과 특수 손장갑을 보내주었다. 렌즈가 없고 눈 밑에 가로 모양의 넓적한 테만 있었던 그 안경을 쓰면 아래를 볼 수 없게 되어 순전히 손의 감각만으로 공을 다루는 연습을 해야 했다.

 

이 안경은 발아래를 보거나 공을 보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장갑 또한 연습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장갑을 끼면 공이 손바닥에 닿아도 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손가락만을 사용하여 드리블을 해야만 했다.

 

허재는 이 장갑을 사용하여 무던히 슛 연습을 한 덕분에, 손가락 끝에 공을 올려놓고 던지는 교과서적인 슛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도 허재를 위해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셨다. 운동 코치뿐만 아니라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장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경기 내용을 기록한 글들과 사진, 그리고 스크랩만 무려 51권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중학교 시절 기본기를 쌓은 허재는 용산고등학교를 거쳐 우리대학 중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농구계의 양대 산맥은 두말할 나위 없이 연대와 고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대학교를 선택한 허재의 결정 뒤에는 그의 아버지와 당시 중앙대 농구부를 이끌고 있었던 정봉섭 감독의 영향이 컸다.

 

허재의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정봉섭 감독은 허재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시절부터 허재를 눈여겨보았고, 이후 허재를 중심으로 대학팀을 꾸려보겠다는 계획을 했다. “센터에는 한기범, 김유택과 같은 걸출한 센터를 포진 시키고 강동희를 비롯해 몇몇 선수들을 스카웃 한다면 중앙대는 분명 우승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6년을 준비한 계획이었다. 허재 또한 한기범, 김유택과 같은 센터와 함께 할 수 있는 중앙대에서, 계발 할 수 있는 자신의 성장 가능성을 염두 해두고 이 같은 진학을 결정했다.

 

중앙대에 진학한 후로 허재의 농구 인생은 승승장구였다. 대학 1학년 때인 84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남자 청소년 농구 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을 누르고 우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매스컴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 2학년 때는 국가대표팀에 발탁이 되었다.

 

국가대표 부동의 가드로 자리를 굳히던 86년 1월에는 말레이시아 ABC에서 숙적 중국을 제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아시안 게임에서는 은메달을 따낸다. 이처럼 활약하던 허재를 위시한 당시의 중앙대 농구부는 농구계를 주름잡던 연세대의 호시절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대학 팀들은 물론 실업팀까지 휘어잡을 정도였다.

 

대학부 전승 무패라는 신화를 창조하였고, 국내 프로리그 출범 전이라 실업과 대학 농구를 모두 포함했던 당시의 농구대잔치에서도 ‘실업팀 전통강호인 삼성전자와 현대전자가 대학팀인 중앙대를 가까스로 이겼다.’로 평가될 정도의 위협적인 전력을 보여주며, 대학팀 사상 최초의 준우승을 달성, 중앙대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간다. 1987년에는 단국대와의 대학농구연맹전에서 혼자 75득점을 성공시키는 ‘서커스’를 연출하여 대회 최우수선수로 선정됨으로써, 멋진 “졸업 작품”을 남기기도 한다.

 

4년 후인 88년, 대학을 졸업한 허재는 신생 실업팀이었던 기아에 입단한다. 세계적 무대였던 88올림픽 개회식 행사에서 여자 핸드볼 대표팀 골키퍼 손미나와 함께 개회식 선서를 맡음으로써,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한국 농구의 얼굴인 동시에 한국 스포츠의 얼굴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허재는 88년 당시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현대와 삼성을 비롯한 유수의 실업팀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지만, 대학시절 중앙대 농구의 전성기를 함께 이끌어가던 한기범, 김유택, 강정수와 같은 선배들이 이미 입단해 있던 기아를 선택해, 다시 한번 중앙대 농구의 전성기를 재현하게 된다. 말 그대로 입단 이후 허재는, 당시 모든 실업팀을 통틀어 최고의 공격형 가드로 군림하며 코트 위를 평정하게 된다.

<사진은 부상투혼으로 유명했던 97~98 기아 vs 현대 결승전>

 

이후 95년, 농구가 국기인 나라 필리핀에서 열렸던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으로 출전한 기아는 사실상 필리핀 국가대표라고 불렸던 필리핀 팀을 만나 경기를 치르게 된다. 기량이 뛰어난 용병들까지 보유한 팀들에 비해 당시 유일한 아마추어팀이었던 기아는 (국내 프로농구는 96년에 출범) 초반탈락이 예상되었던 가운데 준결승까지 진출해 필리핀 팀을 만나게 된다.

 

다른 팀들과는 달리 주최 측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3개의 연합팀으로 구성되었던 필리핀 팀은 강력한 용병들까지 합세해 당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허재의 기아는 이런 필리핀팀을 상대로 분투를 한다. 결국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대표였던 기아는 석패했지만, 필리핀팀에 대한 심판의 일방적인 편파판정에도 불구하고, 허재는 용병을 포함해 그를 마크하던 세명의 선수를 파울-아웃시키며 40여 득점을 기록한다.

 

팀은 패했어도, 경기가 끝나자 관중들은 허재의 이름을 외쳤고, 허재에게 박수를 보냈다. 필리핀 선수들 또한 심지어 경기 중에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허재에게 찬사를 보냈으며, 경기 후에도 싸인을 받고자 모두들 허재에게로 다가갔다. 이 대회에서 허재는, 팀의 4강 탈락에도 불구하고 대회 MVP를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농구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후 크고 작은 대회에서 크게 활약하며, 농구팬들의 마음속에 “대한민국 농구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는 허재는, 남들보다 길었던 농구생활 만큼, 농구에 대한 열의가 어느 누구보다 강했던 만큼, 기쁜 일도, 힘든 일도 많았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적어도 농구와 함께했던 삶에 대해서만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동안, 몇몇 선수들이 오고간다.

 

“얘도 중앙대 출신, 쟤도 중앙대 출신이야.”

김주성 선수와 강병현 선수였다. 이후에도 인터뷰 중간중간 얼굴을 비추는 중앙대 출신 선수들을 한 명 한 명 자랑스럽게 소개시켜주던 허재 감독은 “이미 국가대표팀만 해도 여섯 명이 중앙대 출신” 이라며, 동문들의 활약에 대해 몹시 뿌듯해 했다.

 

더불어 52연승 무패행진을 기록해나가고 있는 중앙대 농구부 후배들을 언급하며, “나를 비롯한 선배들이 달성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루어내며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참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중앙대 농구부로서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그대로 이어나간다면, 앞으로도 더 큰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며 자랑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인터뷰를 마치며 끝으로 중앙대 학우들에 대한 응원 메시지를 부탁한다는 말에 그는 자신의 대학시절을 회상하는 듯 했다. 잠시 후 그는, “대학시절, 농구를 하는데 있어서는 정말 최고의 순간들을 보냈지만, 농구 밖에 모르고 지내서, 대학생이기에 마땅히 경험할 수 있는 소소한 추억들이 거의 없어 참 아쉽다.

 

 

 

시간이 지나면 이처럼 소소한 경험과 추억들마저 아쉽고,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대학시절은 다신 없을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들이라 생각하고 매 순간을 소중히 즐기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미리미리 정해놓는 것은 잊지 말자. 앞을 내다보고 계획할 줄 안다면, 그 만큼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는 말과 함께 “늘 ‘중앙인’이라는 자부심을 잊지 말고, 알찬 대학생활을 하기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인터뷰가 있었던 날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오고, 우산이 몇 번씩이나 뒤집혀 제대로 걷기가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분 날이었다. 문득 그 날이 떠올라 웃음 짓게 된다.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니 날씨가 험해 걷는 게 고생스럽고, 비에 젖어 몸이 떨려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날이었다. 오히려 그만큼 힘들었기에 추억할 수 있는 하루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매 순간 순간을 소중히 생각하면 힘들었던 일들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게 되고, 이러한 추억들이 모이면 나중에는 “즐거웠던 대학시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자리를 빌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허재 선배님과 중앙대 출신 선배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본다. 또한 후배로서, 스타선수 출신은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속설을 깨고,

지도자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허재 선배님의 더 멋진 활약을 기대해 본다.

 

 

  ※허재감독

   출신학교=상명초(서울)-용산중(서울)-용산고(서울)-중앙대

   프로경력=기아(1997-1998년), 나래.TG삼보(1998-2004년), KCC 감독(2005-현재), 국가대표감독(2009.5~)

   수상경력=1984 농구대잔치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

               1991 농구대잔치 MVP,

               1992 농구대잔치 우수선수상, 베스트5,

               1993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득점왕, 베스트5,

               1994 농구대잔치 MVP, 베스트5, 수비상,

               1995 ABC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 MVP,

               1997-1998시즌 챔피언결정전 MVP,

               1999-2000시즌 베스트5,

               2002-2003시즌 모범선수상

 

 

 

취재 및 촬영 : 홍보대사 정성엽(광고홍보), 이세영(영어교육)